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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작성일
 
2024/08/15 18: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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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하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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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는 1865년 6월 11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세네카의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6년 토론토 의대에 입학해 1890년 의학사를 취득했다. 1886년 고향 친구 마가렛 켈리(Margaret M. Kelly)와 결혼했다. 이 부부는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에 동참하였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 지역 의대생들로 구성된 기독청년들의 파송을 받아 1890년 9월 30일 부산에 도착했다. 하디는 처음에는 서울 제중원에서 의료사역을 하다. 1891년 당시 의료 선교사가 없던 부산으로 내려가고 다시 1892년 11월 11일, 원산으로 이주해 시약소를 열고 환자들을 돌보았고, 1893년 12월 자신의 선교센터를 건립했다.
  그는 북부의 영덕 및 북청과 남쪽의 원주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직접 복음전하고 환자들을 돌봤다. 그러던 중 1898년 미국 남감리회로 이적하면서 이듬해 개성으로 자리를 옮겨 남성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사역을 시작했다.
  1900년 12월 15일 원산으로 다시 파송을 받은 하디는 미북 감리회 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로부터 의료와 복음사역을 인수받고, 원산에 주재하면서 의료선교 사역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순회하며 교회를 설립했다. 그 결과 1901년 김화군 지경터에서 장년 15명에게 세례를 주고 강원도 최초의 교회인 지경터교회를 설립했다. 1901년 10월 5일에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강원도 최초의 교회인 양양교회를 설립했고, 이어 강릉 중앙교회를 설립했다. 1902년 제6차 연례회 보고서에 의하면 하디는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주일예배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세례교인은 물론 학습인들에게도 징계를 하였고, 횡령과 타락한 교인을 출교시키는 등 엄격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원산부흥운동 - 1903년 원산 대부흥운동 주역
  그는 1901년부터 원산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개척선교사로 3년간 선교활동을 하였지만 별로 결실이 없었다. 그는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절호의 선교 기회를 잡았음에도 그 결실이 없음을 인해 낙망하고 심한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중국 의화단 사건을 피해 1903년 원산으로 피신해 온 여 선교사 화이트(Mary C. White)와 캐나다 장로회 출신 여 선교사 맥컬리(Louise H. McCully)는 한국인의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회를 시작했다.
  맥컬리는 하디에게 효과적인 기도를 위한 세 가지 필수 요소들에 관한 세 번의 강연을 부탁했다. 하지만 하디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무엇인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자신이 선택한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신앙이 자신에게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회를 준비하던 하디는 자신이 말씀과 깊이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그리고 기도회를 인도하는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통회했다. 이 기도회를 통해 그는 백인으로서 갖는 인종적 우월감, 의사로서의 신분적 교만함, 성령 충만이 없이 해 온 사역 등을 고백했다. 이는 하디 개인의 회개와 통회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성령의 임재가 임하는 통로를 만들어 준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회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로스의 어학 선생 진천수는 “나는 병든 아내를 미워했고,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아내가 병들어 죽은 후에는 이를 수습하느라 친구와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없어 아내를 저주했다.”라고 회개했다.
  이 사건들로 한국교회 마음을 울린 진실한 죄의 고백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시작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이어졌고, 당시 감리회와 장로회 선교사들이 하디를 초청해 연합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하디는 자신의 깊은 영적 체험을 간증하고 회개운동을 촉구함으로 집회마다 참석하는 이들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 은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이들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디 선교사는 한국 교회사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룬 중심인물이 되었다.
 
 평양대부흥 이후 사회 개혁운동 이끌다.
 1908년 원산구역이 지방회로 승격되자 그는 그 지방 감리사뿐만 아니라 선교책임자로 임명되어, 원산구역, 주한명과 함께 영동구역 그리고 이화춘과 함께 간도 지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원산, 평양 부흥운동을 통한 죄의식의 각성과 회개는 한국인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윤리 및 인권의식 제고와 사회개혁으로 이어져 평양대부흥 이후 1909년까지 950여 개의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고, 한국교회는 금주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한국교회는 축첩제도 폐지, 강제혼 금지, 남녀의 평등한 교육기회 부여, 조혼 금지 등을 주장했다.
 
 하디는 1909년부터 1922년까지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1916년 신학 세계를 창간하였으며,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 예수교서회 총무 일을 보았다. 45년간 한국에 있으면서 교육과 의료, 복음 전도 등 열정적으로 일을 감당했다.
 그는 1935년 정년을 맞아 귀국하여 랜싱에 거주하다 1949년 6월 30일에 별세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잃은 그의 두 딸 마리(Marie Hardie)와 마가렛(Margaret Joy Hardie)이 묻혀 있다. 2006년 5월 24일 감리교 본부에서는 하디의 두 딸의 묘를 정비하며, 그의 한국선교 업적을 기리는 ‘하디 선교사 영적 대각성 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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